진시황에 대하여 알아볼까요
진 시황제(중국어: , 병음: Qn Sh Hung D,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6월 14일)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 이름은 정 혹 조정이다. 혹, 씨는 진, 조다.성명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진정, 조정이다. 장양왕과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 생애
기원전 259년 한단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정치적 목적에서 조희가 자신의 아들을 임신한 것을 숨겼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나 사기 본기에는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고, 사기집해에 따르면 영자초와 조희가 혼인한지 12개월 뒤에 영정을 낳았다고 하고 있으니, 혼인 후에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면 생물학적으로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6년,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주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3일만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몸이 매우 허약하였다.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여불위와의 분쟁
새로 13살의 나이로 진나라 왕이 된 영정은 어려서 친정을 할 수 없었고, 이에 장양왕의 후원자 여불위와 어머니 조태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진나라의 내정은 혼란스러워 시황 8년 진왕 영정의 동생인 장안군 성교가 둔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시왕 9년 음력 4월에는 장신후 노애가 진왕 영정의 관례를 틈타 자신의 사병과 융적 부족들 그리고 진왕의 옥새와 조태후의 인장을 도용해서 진나라관군까지 동원해 기년궁을 공격한다. 그러나 상국 창평군과 창문군이 반격해 함양에서 전투를 벌여 진왕 영정의 군대가 승리하고 노애와 반란군들은 도망치다 붙잡혀 처형당한다. 노애가 조태후와 불륜해서 낳은 두 아들도 처형당했고 , 노애의 측근 4000명을 변방 오지인 촉지역의 방릉으로 추방시킨다.
일설에는 조태후가 여불위와 불륜관계였고 여불위는 진왕 영정이 성장해가며 두려움을 느끼자 조태후에게 노애를 대신 소개시켜주었고, 노애는 환관으로 위장해 조태후와 불륜관계를 이어가면서 아이까지 생기자 그 아이를 진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유는 어찌되었든 어머니 조태후와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된 혐의가 발견되자 진시황은 본격적으로 숙청을 시작해 우선 어머니 조태후는 옹땅에 1년간 유배시켰고, 여불위는 시황 10년에 면직시키고 시황 12년 여불위는 사망하는데 여불위를 조용히 묻고는 장레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면직시키는 처벌을 내렸다(본기). 이때문에 일설에는 진시황이 편지로 여불위를 모욕하고 촉으로 추방할것을 지시하자 분노와 두려움에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국 통일 과정
전국 통일 과정은 이미 시황제가 즉위 하기 이전인 장양왕때 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장양왕이 기원전 250년 주나라 정벌, 즉 진주전쟁에서 승리하여 정복 병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시황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기원전 231년 9월 제일 먼저, 진나라는 전국 7웅중 세력이 약했던 소한부터 공격해 남양을 점령하고 기원전 230년에는 한나라 왕 한안까지 포로로 잡아 한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
기원전 229년에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조나라도 이목 (조나라) 사마상 등이 항전하는데 진나라는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조종해 이목은 처형하고 사마상을 파면시킨 뒤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같은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한다. 다음해인 기원전 228년에는 한단을 점령 조나라왕인 유목왕 조천을 사로잡는다. 한단이 점령되자 조나라의 공자 조가는 대()로 피신해서 대나라를 세워 왕이 된 뒤 연나라와 연합해 상곡()에서 저항하자 기원전 225년 대나라를 공격해 점령하고 조천을 사로잡아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기원전 227년 연나라에서 사신 형가를 진나라 함양으로 보내 신하되기를 자처하며 그 증표로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망명했던 번오기의 목과 독항 지역의 지도를 바친다. 이에 진왕 영정은 함양궁에서 형가의 사절단을 맞이하였는데 사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희단의 사주를 받은 자객으로 그자리에서 지도속에 숨겨둔 칼로 영정을 공격하나 간신히 반격한다. 진왕 영정은 연나라의 암살시도에 분노하며 즉시 연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연나라도 대나라(조나라 부흥세력)와 연합해 반격을 시도하지만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226년 10월에는 수도 계를 함락하고 암살을 사주한 연나라 태자 단의 목을 얻는다. 연나라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가 저항하지만 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요동을 함락하고 연나라왕 희를 사로잡으면서 연나라도 멸망한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최초의 황제
시황제는 국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처음에 정은 도교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다. 결국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30 kg)으로 정해졌다.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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