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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생애

ehdaudzns189 2021. 1. 4. 23:00

유비의 생애

 

한 열조 소열황제 유비(161년 ~ 223년 6월 10일(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5월 15일(음력 4월 6일) ~ 223년 6월 10일(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고 팔아 연명하다가 청년 시절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이것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자 중국 대륙 전체가 군웅할거 시대로 난세가 펼쳐진다.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는 한나라의 황실 성씨였으므로 유황숙()이라고도 불렸다.

 

유비의 생애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이 고향인 사람으로, 한나라의 황손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표현이지만, 그는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은 부처의 귀와 그 밖에 특이한 모습을 조합하여 삼국시대 이후 기나긴 세월동안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이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다섯 길이 넘는 큰 뽕나무가 있어 그 모양새가 마치 황제가 타는 가마의 덮개처럼 보였는데,이 마을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어려 철이 없던 유비는 나무에 올라 향리의 친구들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이런 가마를 탈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집안어른 유원기는 어린 유비에게 주의하기를, 함부로 황제의 가마를 타겠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구족이 멸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집안어른 유원기의 지원으로 그는 열다섯 살에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였고,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싯적부터 명마를 감별할 줄 알았고, 항상 말수가 적었으며, 늘 남을 공손히 대하였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의 난 때 장각()은 청주, 유주, 서주, 기주, 양주, 연주, 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후한 말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관우, 장비와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잘 정도로 유달리 친하여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장순, 장거의 난을 진압하여 그 공적으로 중산국() 안희현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내 독우가 유비를 쫓아내려 하였으므로 유비는 그를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가 곤장 200대를 때린 후 떠났다.(독우는 사람이름이 아니고 후한말에 있던 하급 관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조정에서 내려보낸 일종의 감찰사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그당시 안희현을 시찰하였던 독우는 평소 유비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후 단양에서 도위() 관구의()의 모병에 응하여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유비는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이내 그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였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의 휘하시절

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형제가 없었던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조정에 천거하여 별부사마()에 제수되도록 조치하였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우도록 하였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조정에 이를 보고하고자 표를 올렸고, 덕분에 유비는 평원의 상으로 임명되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게되었다. 이때부터 유비는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도겸의 유지를 받들고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하비의 모든 호족들이 유비를 반겼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일은 훗날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공손찬 사후

196년(건안()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과 대치하게 되어 하비성을 비우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호족들 중 한명이었던 성문도위 조표는 여포의 연합 세력의 한명이었던 진궁과 내통하여 배신하였다.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었고, 유비는 소패에 내몰려졌다. 그러나 소패에서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여겨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졌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하비를 포위하였는데, 여포의 부장 후성, 송헌, 위속 등이 배신하여 여포를 옳아 맨 뒤, 조조의 군세를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앞서 행하였던 패악을 조조에게 귀뜸했고 이를 잘알고 있던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하였다.[3]

 

조조의 휘하시절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었고, 조조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조조의 참모 정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였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의 국구인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헌제의 밀칙을 받았는데,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술되었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하여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났다. 그리고 유비는 원술을 멸한 후 조조가 준 증표를 이용하여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하비를 점거하였다. 그는 곧 서주자사 차주()를 죽인 뒤. 관우를 하비에 남겨 성을 수비하도록 명한 뒤 소패로 돌아갔다. 이때 다수의 군현들이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그는 황제였던 헌제를 만나는데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어느날 유비가 군웅이던 시절 헌제는 유비를 만나게 된다. 헌제는 유비가 자신과 성이 같자 그의 가계도를 조사했고 그가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헌제 역시 경제의 아들인 정발왕의 후손이었다. 그가 자신의 황친인 것을 알자 헌제는 그를 유황숙이라 부르며 그를 굉장히 아꼈다. 유비 역시 헌제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고 후한 멸망 후 헌제가 죽은 것으로 착각하여 촉한 건국 후 친히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 헌제에게 효민황제 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소의 휘하시절

이때 조조는 왕충과 유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그들은 패배하였다. 200년 조조는 친정하여 유비를 토벌하였는데, 유비는 패배하여 유비의 수하 장수들은 흩어져 유비는 홀로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조정에 천거한 사람이었으므로, 원담은 이에 보답하고자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이하였으며 원소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였고, 업에서 2백 리(80km)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 한편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허도로 귀환했다. 이로부터 원소와 조조는 관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는 유비와 유벽를 허 아래로 파견하여 공략하였다. 이때 조조로부터 달아난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이내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고자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남에 진을 쳤다. 조조는 채양을 시켜 유비의 군세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채양은 패배하였고 난전 중 전사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의 곁을 떠나서 유비에게 갈 때 관우를 죽여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되었으며, 이후 관우가 진기를 죽이자 하후돈이 나와 그가 채양의 외종질이라고 언급한다.

 

진기가 죽은 것을 알게 되자 조조에게 거듭 관우를 추격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묵살되었지만 관우가 장비가 있는 고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채양은 조조의 명으로 여남을 가던 도중에 멋대로 고성으로 진로를 바꿔 싸움을 걸었다. 이 때 장비가 채양의 병사를 관우가 끌고 온 조조군의 병사로 오해하고 화를 내자 관우는 적장의 목을 베어 결백을 증명하겠다면서 장비 또한 북을 세 통 두드리는 사이에 베어 오라고 하자 관우는 북 소리가 한 통을 다 채우기도 전에 베면서 장비와의 오해를 푸는 요소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관우가 조조 휘하에 있을 때 장료, 서황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은 관우를 존중하였는데 채양 혼자서만 관우에 대해 불복했다는 언급이 관우가 조조를 떠날 때 나오며 진기가 죽기도 전에 이미 채양은 관우를 추격하겠다고 나섰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뒤 몸소 남하하여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이후 유비는 유표에게 귀의하였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하였다.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도록 했다.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주연 중 유비가 잠시 변소에 들렀는데, 그는 허벅지에 살이 쪄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주연으로 돌아왔을때 그의 얼굴에 남겨진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유비가 답하기를,저는 말안장을 떠나본 일이 적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은지 일곱해가 되어 어느덧 허벅지에 살이 붙었고, 세월이 흘러 저는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탄스러워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비육지탄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 채모 등이 연회 중에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도망하였다. 단계를 만나 유비는 힘을 내라며 적로를 다그쳤는데, 놀랍게도 적로는 세길이나 뛰어올라 유비는 단계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배송지는 또한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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